분류 전체보기130 목련 자신의 하늘만 높다 자만하야 저 높이 붉게 솟은 십자가들만 미워했었는데 모르는 사이 복닥복닥한 소시민들의 뒷마당에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라. 나는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문득 철마다 스며드는 아픈 기억만큼이나 도시에 대한 나의 연모가 깊다는 걸 깨달았다. 2009. 4. 2. 어리석은 자 천재는 자신과 바보의 차이가 언제나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눈앞에 닥친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런 노력 속에서 지성이 존재한다. 반면에 바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별력이 뛰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부러울 만큼 평온하게 안주한다. 마치 서식하는 구멍에서 곤충을 끌어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바보를 어리석음에서 끌어내어 잠시나마 암흑세계를 벗어나게 하고 습관에 젖어 있는 멍청한 시각을 보다 날카로운 다른 시각과 견주어보게 할 방법은 없다. 바보는 평생 바보고 빠져나올 구멍도 없다. 그래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어리석은 자가 사악한 자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사악한 자는 이따금 쉴 때가 있지만 어리석은.. 2009. 3. 31. 언제나 여기에 머물거야 지루해져만 가는 대화들이 짜증나 비가 추적거리는 거리로 나섰던 거다. 형수님이 사주신 재킷은 다행히 방수가 잘 되는 편이었고 뒤집어쓴 모자 안으로는 비가 새지 않으니 행복한 것이다. 다만 젖은 캔버스가 쩍쩍거려 짜증날 뿐인게다. 나의 것이 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그 존재들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내가 원하던 그 아름다운 것들은 손가락 마디 사이를 스르륵 흘러버리는 고운 모래처럼 소원한 것이더라. 새벽 2시인게다. 나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복개 도로를 싸구려 음악을 들으며 터벅거리는거다. 앰뷸런스가 싸구려 음악에 묻혀 정적의 싸이렌을 깜빡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여전히 윈드 브레이커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갈비집에서 실려나오는 남자를 구경했다. 무지개색 우산을 들고 나선 종업원은 짜증이 나 있었던게.. 2009. 3. 25. 검정 치마 유리 언니가 가끔 내킬 때 회사 사람들한테 음악 공유해 주곤 했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도 몇 개씩 공유해주곤 했었는데 어쩌다 재미가 붙어서 이젠 매주 한 앨범씩 공유해 준다. 이젠 매주말이면 어떤 앨범을 공유할까 고민까지 하게 되는데, 이번 주는 진즉부터 오스카 시상식에서 화제가 되었던 "Slumdog millionaire"의 사운드 트랙을 염두에 두고 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검정 치마라는 희한한 밴드를 발견하고 말았다. 앨범을 구하자 마자 길을 가나 차를 타나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내 휠링. 고민도 하지 않고 검정 치마를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검정 치마의 핵심은 이름도 안드로메디안 아스트랄한 82년생 조휴일로 왕년 스타리그.. 2009. 3. 2. #1 - 참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 그럼, 그랬지. - 하지만 이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요. - 무슨 소리야, 레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거야. - 그렇지 않아요. 소화기에 짓이겨진 머리통처럼 되돌릴 수 없는 거에요. - 자꾸 그런 생각에 집착하지 마. - 제가 죽은 언니 얘기를 했던가요? - 그럼. - 그랬죠. 제가 언니 얘기를 할 때마다 당신은 그런 표정을 지어요. - 어떤 표정인데. - 글쎄요,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언잖은 듯한 표정이에요. - 그렇지 않아, 레지. - 당신이 그래도 전 또 언니 얘기를 할 거에요. - 언제든지. - 그만 둬요. 역시 행복한 시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에요. - 아니야,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해봐. - 제가 언제나.. 2009. 2. 21. prejudice - Uh?. So are you living with kitties? - Yeh. - Are you a faggot? - Uh? You seem to have chosen an easy way of living. - Uh? What the heck are you talking'bout? - I mean with prejudices you know. Cat keepers are gays, women who like coffee-colored hose are picky, nail-biting kids are paranoic, and so on. People like you may lead a efficient life but give away chances to get genuine wisdom at the.. 2009. 2. 14. . 나는 검은 피로 얼룩진 검은 원피스를 입고 어수선한 교정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올빼미가 애기 울음 소리를 내는 흥청스런 밤이 되면 머리가 벗겨진 늙은 교수가 어린 학생에게 추근거리고 며칠 새 일러진 해가 뿌연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우윳빛 살을 뿌리면 길 잃은 자들이 교실에 모여 신을 부르짖었다. 나는 다만 늦지 안길 바랄 뿐이었고, 잠긴 문 안에 가지런히 놓여진 내 가방을 찾고 싶을 뿐이었지만. 신발장의 낡은 실내화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는 신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찬 복도를 타박타박 걷는 것이다. 내 아비가 기다리고 있는 부두에 늦지 않길 바라고 걸을 뿐이다. 자식들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이 갈구하게 만든 내 아비를 원망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내 부.. 2009. 2. 12. a sardine 수족관에서 방금 건져올려진 정어리의 눈을 생각나게 하는 그 소녀는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에 대해 푸념을 하고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다른 사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데. 내 머리 속을 맴도는 그녀는 그 옛날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던 그녀는 눈같이 창백한 손목에 별 모양의 문신을 그어놓고 있었다. 왜 당신은 거기서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렇게 별문신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정어리 눈은 아마도 오년 전쯤 비 오는 전화 부스 앞에서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인데. 헤어질 때와 똑같은 냄새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냄새와 눈의 탁도 같은 것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2009. 1. 21. 쳇 쳇, 니까짓 게 추워봤자지. 2009. 1. 14.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 Voltaire 이 일갈은 한 때 우니 삼촌의 기괴했던 홈페이지의 타이틀을 장식하던 문구였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되뇌이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던 어느 날 저녁, 비겁하게 외면하자며 고개들어 달무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젖먹이 시절부터 하느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던 그 프랑스의 자유 사상가의 말이 생각이 나 눈물이 다 나더라. 2009. 1. 13. 이전 1 ··· 3 4 5 6 7 8 9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