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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ra

검정 치마

by erggie 2009. 3. 2.
유리 언니가 가끔 내킬 때 회사 사람들한테 음악 공유해 주곤 했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도 몇 개씩 공유해주곤 했었는데 어쩌다 재미가 붙어서 이젠 매주 한 앨범씩 공유해 준다.

이젠 매주말이면 어떤 앨범을 공유할까 고민까지 하게 되는데, 이번 주는 진즉부터 오스카 시상식에서 화제가 되었던 "Slumdog millionaire"의 사운드 트랙을 염두에 두고 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검정 치마라는 희한한 밴드를 발견하고 말았다. 앨범을 구하자 마자 길을 가나 차를 타나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내 휠링. 고민도 하지 않고 검정 치마를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검정 치마의 핵심은 이름도 안드로메디안 아스트랄한 82년생 조휴일로 왕년 스타리그 팬이었다면 김대기를 떠올릴 만한 요상한 외모의 소유자다.


바로 이 친구(MBC 음악여행 라라라에서 몰캡)

조휴일이 본명인 줄은 모르겠으나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잘 "노는" 친구다. 평범한 아이보리 기타 언저리엔 붉게 Holiday!라고 새겨놓은 걸로 봐서 이름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한 듯. 조휴일은 우리 나라 언더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이 바닥의 더러운 현실에선 더 이상 놀아봐야 소용 없단 걸 깨닫고는 도미, 뉴욕의 지하 스튜디오를 누비며 로드 워리어 생활을 시작한다. 관객이 있건 없건 미친 듯 연주했다고. 홍대 시절 홀리데이를 기억하는 일대 클럽 죽돌이들은 연주 더럽게 못하는 찌질이들이었다고 회고할 정도. 미야모토 무사시의 무사 수업을 방불케하는 막무가내식 라이브 투어로 음도를 깨우친 듯 지금의 라이브는 그 어떤 기성 밴드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2004년 뉴욕에서 처음 검정 치마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그 후 여느 밴드처럼 이런 저런 쌈질과 멤버 교체 이후에 2007년 지금의 라인업을 갖췄다고. 그런데 이게 뭔가. 돌아온 탕아가 달고 온 멤버라는 게 맨하탄 뒷골목의 홈리스 캠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언니다. 키보드를 맡고 있는 샤샤라는 이 친구는 한국말로 노래까지 따라부른다. 이 밴드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바로 이 언니(역시 라라라)

201(뉴 저지의 거리 이름)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검치의 첫 앨범과 관련된 비화도 사못 흥미롭다. 먼저 재킷부터 보자.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말, 그것도 조랑말이다. 기실 배경을 들어보면 고개를 주억거릴만도 하다. 2007년 한국에서 찌질하게 공연하다가 상처받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미국에서 앨범을 녹음했다. 그냥 CD로 구워서 공연장에서나 팔려는 작정이었다고. 근데 반응이 너무 좋은 거다. 홀리데이랑 샤샤 두 멤버로 활동했을 때니깐 호응에 부응해 발매는 하되 힘을 싣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매장에도 안 돌렸단다. 그래도 인기는 식을 줄 몰라. 급기야 금영 사장한테서 인디 레이블쪽으로 연락을 한 거다. 할리데이가 외국인이라 저작권 등록이 안 되어 있으니 조치를 취해달라고. 노래방에서까지 난리가 난 거지.

그래 그 전에도 Seam처럼 외국물 좀 먹었다는 밴드는 있었으나 그런 친구들의 음악에선 미국의 소수 민족 공동체에서 소외당해서인지 왠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졌었다고 해야겠다(그렇다고 seam를 폄하할 생각은 절대로 없고). 하지만 홀리데이의 음악에선 이국의 말코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퍼마시며 뒹굴어야만 느끼고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연스러운 이국색이 느껴진다. 이건 박자만 들어보면 스트록스나 스웨이드를 듣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한국적 정서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70년대의 산울림이나 신중현을 생각나게 하는 가락이나 신랄한 한국어 가사에 심지어 절묘한 육두문자까지.

혹자는 한 곡, 한 곡 평범한 앨범의 타이틀로 내놓아도 좋을 만하다고 극찬을 한다. 대체적으로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나마 옥석을 가려보자.

1. 좋아해줘.
홍대 근방 노래방을 점령한 검치 최고의 히트작이다. 황신혜 밴드를 연상시키는 인트로부터 고고비트로 쉴새없이 내달리다 난데없이 스카비트로 왔다 갔다 한다. 길 걸을 때 들으면 최고. 운전할 때는 삼갈 것.
2. stand still
일단 우리말이 아니라 휠이 잘 안 온다. 최고의 곡으로 평하는 자도 있던데 난 별로.
3. 강아지
한 마디로 2008년 최고의 곡. 신랄한 가사부터 그루브까지. 손가락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들어보면 안다. 집에서 혼자 들으면서 춤추기 딱. 완곡한 듯 날카롭게 비꼬는 노랫말은 그야말로 감동.
4. 상아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했었는데 아마도 사람 이름인 듯. 알 듯 말 듯한 가사도 맘에 들고 샤샤의 신디와 묘하게 어울리는 기타 리프도 신난다.
5. antifreeze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여버리겠다는 사랑 노래. 단순한 선율이지만 왠지 정이 간다.
6. tangled
조금은 어두운 듯한 감성의 곡. 후렴구의 "럽 스테이 윗 미"에선 뜨거운 게 가슴에서 막 올라온다. 절묘한 타이밍의 시발은 애절하기까지 하다.
7. Avant garde Kim
블루스 리듬이 앨비스를 연상시키지만 좀 방정맞아서 별로.
8. Le Fou Muet
포스탈 서비스를 연상케하는 몽환적인 신디를 배경으로 "우린 뜨거워야 해"를 외친다. 중간에 불언지 뭔지 웅얼거리는 사람들 목소리랑 너무 잘 어울린다.
9. Dientes
스페인어로 이빨이란다. 앞 부분 대충 들어보니 언니 만나서 어찌저찌하는 내용인 듯. 뭐 내 입으로 니 이빨을 느끼고 싶다는 뜻 인 듯하다. 뒷 부분은 유창한 스페니쉬를 웅얼거리는데 어찌 들어보면 우리 말처럼도 들려서 흥겹다. 단촐한 스카 리듬에 후렴구엔 떼창까지 곁들여줘서 감칠 맛 난다.
10. Kiss and tell
어디서 공수했는지 아줌마 코러스까지 덧붙여서 제법 세련된 곡을 만들어냈다. 재즈 냄새까지 나는 피아노 반주와 흑인들 웅얼거림까지 꽤 멋을 냈네.

총평
"대충 만들어 공연장에서 나눠주려고 만들었다고 하기엔 앨범 전체의 완성도가 너무나 놀랍다."

쓰다보니 제법 길어졌다. 그만큼 꽂혔단 얘기다. 앞으론 이런 일 별로 없을테니 장문의 포스팅으로 괴롭힘 당하길 기대하지도 말자. 아뭏든 대충 훑어읽고 당장 들어보자. MBC 음악여행 라라라와 EBS 공감 스페이스 출연 영상도 찾아서 보면 재미 두~ 배~.

"우린 뜨거워야 해"
참으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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