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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1

by erggie 2009. 2. 21.
- 참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 그럼, 그랬지.
- 하지만 이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요.
- 무슨 소리야, 레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거야.
- 그렇지 않아요. 소화기에 짓이겨진 머리통처럼 되돌릴 수 없는 거에요.
- 자꾸 그런 생각에 집착하지 마.
- 제가 죽은 언니 얘기를 했던가요?
- 그럼.
- 그랬죠. 제가 언니 얘기를 할 때마다 당신은 그런 표정을 지어요.
- 어떤 표정인데.
- 글쎄요,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언잖은 듯한 표정이에요.
- 그렇지 않아, 레지.
- 당신이 그래도 전 또 언니 얘기를 할 거에요.
- 언제든지.
- 그만 둬요. 역시 행복한 시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에요.
- 아니야,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해봐.
- 제가 언제나 즐거운 상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걸 알지 않나요?
- 오늘은 어떤 상상이야? 당장 생각나는대로 해보자구.
- 그런다고 행복한 시간이 돌아오지 않아요. 일전엔 캐치볼이 하고 싶었어요. 어릴 적 언니와 같이 살던 아파트 단지 공터에서 말이에요. 언니가 높이 던진 공이 오른쪽 어깨 쪽으로 날아오는 거에요. 오른 쪽으로 날아오는 공은 언제나 받기 힘들거든요. 그걸 여유 있게 받아내는 거에요. 그러곤 입술을 조금 들어올려 웃어주곤 왼팔을 살짝 내리면서 손목 아래쪽으로 공을 부드럽게 떨어뜨려 오른 손으로 받아드는 거에요. 그러곤 언니에게 똑같은 코스로 공을 던져주는 거에요. 내가 완벽한 자세로 해낸 걸 언니도 할 수 있는지 보는 거죠. 언니는 언제나 실수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그런 일이 다시 가능할 것 같아요?
-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서 캐치볼을 할 수 있어.
- 아니에요. 당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그런 행복한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에요.
- 순간은 우리가 만드는거야.
- 또 노인네같은 얘기를 하는군요.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순간을 즐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일을 걱정하잖아요. 전 내일따윈 상관하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어요.
- 내 생각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냐?
-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는군요. 당신은 지하 보도에서 소화기에 머리가 짓이겨진 언니가 없었으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
- 이제 그 얘긴 그만 좀 해.
- 그래요. 이제 지겨워진 거에요. 당신도 인정하기 시작하는군요.
- 아니야 레지.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어.
- 언젠가 당신 품에 안겨서 수다를 떨면 행복할 것만 같았던 날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카페 유리창에 붙은 빛 바랜 사진처럼 볼품이 없어요. 이렇게 내 말을 듣지 않는 남자와 쇠할 바에야 도버 해협에 몸을 던지는 게 나을 거에요.
- 계속 듣고 있었단 거 알잖아.
- 제이크, 이제 자신을 그만 속여도 되요.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아요.
- 그렇다고 나쁘지 만은 안잖아.
- 언니와 캐치볼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쁜 게 어디 있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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