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준비한 출장 길에 단지 가볍고 두께가 얇다는 이유로 야간 비행을 챙겨왔다. 수십 번을 읽었더라도 다시 책장을 펼치는데 주저함이 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나에겐 야간 비행이 바로 그런 책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어두운 방 한 구석을 빼곡히 차 있던 범우 문고사의 세계 문학 전집 중에서도 겹비닐 필름이 벗겨지도록 유난히 애독하던 책이 쌩 떽쥐페리 편이였다. 햇살이 비치는 날이나 추적거리는 비로 눅눅한 날이나 심란스런 바깥 세상의 유일한 창이었던 베란다를 등지고 누워 세로로 내려가는 문장에 빠져 눈보라 치는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를 피해 날고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해 터번을 두른 베두인 족의 구조를 받았다.
미지의 밤과 험한 항로의 개척자인 비행사의 무용담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유년의 마음을 매료시켰다. 황금빛 노을을 시작으로 서서히 드리워지는 밤의 장막에 대한 묘사라던가 광활한 대지에 홀로 켜진 오두막의 등불을 밤의 바다에 홀로 떠내려가는 배에 비유한 문장이 어린 마음에 일으킨 설렘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오로지 대시 보드의 희미한 붉은 불빛에 의지해 끝없는 밤의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고 있다 순식간에 기체를 잠식하는 폭풍우에 대항해 싸우는 비행사는 너무나 호방하던 형들에게 버림받은 연약한 소년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각인되었다.
세월이 남긴 침식과 퇴적으로 변화한 사고의 컨텍스트는 동일한 책에서 다른 감상을 이끌어낸다. 난잡한 호텔방의 침대에 누워, 읽다가 졸다가를 반복하며 읽어 내려간 문장들에서 새로운 의미가 새로운 컨텍스트 위에서 새로이 인식된다. 늦은 밤 불 꺼진 사무실이라던가 구석에 홀로 켜진 데스크의 당직 근무자, 정적을 깨는 전화 벨소리, 먼 웅얼거림, 타이프 라이터 소리가 친숙한 소재로 새롭게 다가온다. 한 평생을 새 항로를 개척하는 데 바친 뤼비에르가 점점 노쇠해가는 몸의 반응을 통해 잠기는 회한이라던가 직책이 주는 무게로 비행사에게 가지는 동료적인 감상을 버려야 하는 심약한 감독관, 그런 감독관의 심리적 연약함을 다그치고 감정을 배제하길 지시하는 뤼비에르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감히 “Love the men under your orders, but do not let them know it.”이라고 말하는 뤼비에르를 자신에게 투영해본다. 삶과 일을 어깨에 짊어진 자의 놀랍도록 이성적인 충고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호호, 너무 진지해졌나?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웃기는 얘기긴 하지만 그 무슨 숭고한 직업적 책임감으로 항로 개척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실수를 범했다고 하여 머리가 희끗해질 때까지 일에 평생을 바친 늙은 엔지니어를 경질시키는 냉철한 인간이 되기 보다는 그저 거리의 노숙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은 아이러니가 되고 말았지만, 쌩 떽쥐페리에 대한 경외도 변하지 않는다.
mantra
야간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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