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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ra

lost in translation

by erggie 2009. 10. 2.

동일한 수용자가 동일한 매체를 접한다 할지라도 감정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

Lost in translarion은 그 이름도 감히 담기 부담스러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가 2003년 제작한 작품으로 오스카 상을 수상하고 영화계 안팎으로 숱한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5년이 넘도록 각종 영화 매니아 사이트에서 상위에 랭크된 작품이라 믿고 두 번 감상을 시도하였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매번 끝까지 보지 못하였었다. 영상 몰입증이 있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끝까지 몰입하고 보는 편(아, a급 영상물은 제외 –_-)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두 번의 완감 실패는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해야겠다. 처음 감상 시도 때는 심신이 지극히 피곤한 상태라 감기는 눈을 참지 못하고 모니터 앞에서 잠을 자버렸다. 두 번째가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잘 표현해 주는 경우인데 도대체가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의도적으로 플레이어를 종료해버렸었다. 이립이 넘도록 여자라는 종족은 외계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고 이 신기한 존재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섬세한 여성의 시선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힘들겠지 했고 아버지의 후광을 받은 평범한 감독이 과대평되었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텔 아비브의 낯선 네온 사인이 번쩍이는 거리를 달리는 택시의 역시나 낯선 가죽 시트에 곤한 몸뚱아리를 앉히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택시 창 너머로 도쿄의 거리를 멀뚱거리는 빌 머레이의 어수룩한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물론 빌이나 샬롯(스칼렛 요한슨 분)이 머물던 호텔 방엔 비할 바 못되지만 나름 운치 있는 호텔 방의 테이블에 랩탑을 올려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거진 3일에 걸쳐 느려터진 와이어리스 커넥션으로 지구 반대편 한국의 서버로부터 영화를 다운받았다. 다운을 완료한 후에도 일정에 치여 감상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어나서야 겨우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낯선 사람과 술집과 식당과 거리에서 방황하는 위기의 중년과 결혼 생활 신참내기 처자의 감정이 과장없이 잔잔하게 묘사되고 있다. 일본에서 의류관련 사업을 한 감독의 이력을 감안한다면 이처럼 섬세한 묘사가 쉽게 수긍이 간다. 그리고 이국의 낯선이가 되어보지 못했던 내가 영화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해가 된다.

영화에 대한 감정 이입이 충분치 못했던 또 다른 이유라 한다면 뚜렷한 플롯의 부재를 들 수 있겠다. 숨을 죄는 듯한 긴장감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고 기승전결도 없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감상해서는 안되는 작품이었다. 이국의 이방인으로써 느끼는 일탈의 충동이라던가 익숙치 않은 시스템에 노출되었을 때 밀려오는 혼란에 감정이입하지 못한다면 졸기에 딱 좋은 작품인 것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마도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것으로 보이는, 이스라엘의 호방한 여인네와 비교해 보아 한국 사회의 억압에 찌들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아줌마의 볼썽 사나운 눈총을 억지로 모른 척하며 감상한 영화는 그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도쿄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쪼그려 앉은 샬롯만 봐도 가슴이 죄어오고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는 샤브샤브 식당 메뉴를 보고 화를 내는 장면에 웃음이 났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빌이 키 작고 낯선 이들이 우글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서방인을 보고 호감을 보인 것과는 달리 문때기 없으면 따라도 되는 것인지 저마다 한 문양씩 지지고, 호박만한 화이바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호방한 이스라엘 여인들 사이에서 간혹 한국인이 보이면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 정도랄까.

사족으로 아엠디비에서 발췌한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덧붙인다. 참고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소피아는 처음부터 빌을 캐스팅하기로 결심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빌은 최고의 캐스팅이었음에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빌은 영화 촬영 직전까지 확답을 주지 않았고 촬영 당일에야 아무 말없이 나타났다고 한다. 빌은 그 후 본 영화를 자신의 최고의 영화라고 말했다. 빌의 구력으로도 추측이 가능한데, 많은 대화가 애드리브였다. 최고의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거리 씬 역시 스크립에 없던 장면이었다. 해당 씬에서 빌이 샬롯의 귀에다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는데 수년동안 빌과 스칼렛, 그리고 소피아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며 후에 특수 장비를 이용해 해독한 문장은 "I love you. Don't forget to always tell the truth."이었다고 한다. 단연 최고의 장면이다.

동일한 수용자가 동일한 매체를 접한다 할지라도 감정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경험의 장을 넓혀야 할 의무를 게을리하여서는 안된다. –_-; 쌩뚱맞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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