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2년 동안 질질 짜는 소리나 해가며 개발한 물건이 비공식 출시되었다. 물론 아이폰이나 플스처럼 세인들의 관심을 한꺼번에 받아 굳이 떠들지 않아도 난리가 나는 제품이 아닌지라 이렇게 광고를 해야한다. 스택 개발과 영업을 담당하게 된 이스라엘의 라드비전의 사이트에 들어가면 대충 머하는 앤지 알 수 있다.
난데없는 얘기긴 하지만 며칠 전 같이 일하는 녀석이 대뜸 “오빤 꿈이 뭐야"라고 물어 봤다. “꿈 없이 사는 거"라고 얘기해 주며, “그럼 넌 뭔데"라고 되물었다. 피식 웃으면서 “내 손으로 멋 있는 제품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어.”라더라. 사실 좀 감동을 먹었다. 아무래도 남자나 할 수 있는 말 아니던가.
그 친구 말을 듣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신에 참 표정으로 “꿈과 자부심 하나만으로 4년여의(이 제품 이전에 삽질 좀 했다) 고통을 이겨내고 제품을 드디어 출시했어요!”라고 구라를 치고 다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뭔가 오피셜한 관계를 만나면 그렇게 시부리고 다닐꺼다. 나도 살아야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 내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우연의 음악"의 나쉬가 운명에 몸을 맡긴 채 고약한 현실을 짊어지고 걸어간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매 순간 해야만 하는 난해한 선택들 중에서 정답일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에 체크를 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 온 결과인 게다. 눈 앞의 문제, 눈 앞의 선택지 이외의 것들에 얼마나 가능성을 열어 두었었냐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품이 전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는 감회에는 뭔가가 있다. 나쉬가 아일랜드의 고성을 해체해 남은 돌들로 의미 희박한 벽을 쌓으며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떠오른다. 어찌됐건 윗사람들까지 비웃던 일을 그런대로 멋지게 해냈다. 팀원들의 손발은 그런대로 잘 맞아 떨어졌고 지샌 밤도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과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배울만큼 배웠다. 내 의지가 뭐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궁시렁대지 않고 묵묵히 주어지는 일을 했다.
이제 의지가 말해주는 구체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길들을 따라 거처를 옮기게 된다. 시기는 꽤나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제품이 시장에 나가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마 개발 과정 이상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떠나는 것이 미안하다. 그래도 홀가분한 마음을 애써 감추지 못하겠다. 벌써부터 새롭게 주어질 일들이 주는 기대와 걱정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정도니까.
마지막 고과를 받기 위한 성과 발표 면담에선 그런 홀가분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어차피 떠나는 사람에겐 팀마다 할당되어 있는 고과를 굳이 베풀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전반기의 발표 자료를 그대로 복사하고 대충 말로 때웠다. 전반기의 자료를 미리 열어 본 예리한 평가자가 뭐가 더 나아진 거 같냐고 빈정대는 투로 묻길래 없는 거 같다고 얘기해 주니 모두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하고 싶은 말에 수없이 지새운 밤이 힘들었다고 대충 끄적겨려 놓았는데 출퇴근 시스템 기록을 떡 하니 내밀며 뭐 별로 안 샌 거 같네라며 빈정댄다. 첨엔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는데 나중엔 참 딱했다. 그들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시간도 의욕도 없는, 무전으로 수집한 정보만으로 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을 지시하는 배불뚝이 장교를 연상시켰다. 마지막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정까지 확실히 떼주는 건 분명 고맙다고 해야하겠다.
싼 가격에 12살이 넘은 중고차를 구입했다. 평생 탈것들엔 욕심 가지지 말고 살자던 사람의 말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젠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지나 스펙터의 음악을 틀어놓고 해변도로를 달리는 상상으로 지운 기억을 메꿨다. 그러고 보니 차의 오디오 데크는 카세트만 먹는 애였다. 허허. 왜 사냐면 그냥 박지요.
마지막으로 박는 영상 하나. 나이가 들어도 박는 건 너무 좋다.
samsara
일이 돌아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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