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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one thing and another

by erggie 200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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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동료가 일하다가 쓰러졌다. 침대카트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난생 처음 구급차를 타봤다. 한밤의 응급실은 재난 상황을 방불케 할 만큼 붐볐다. 싸움질로 얼굴이 엉망이 된 교복, 자전거에 처박은 아이, 이유없이 보채는 젖먹이들. 내 몸 역시 과로로 망신창이가 된 상태라 대기실에 앉아 눈을 좀 붙이려고 했으나 쉴새없이 울어대는 기저귀받이들 때문에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침침한 눈으로 4시간 동안 원숭이 섬의 비밀을 플레이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사람이 쓰러졌는데 마음이 너무 차분하고 냉정해서 놀랄 정도다. 강해진건지 감정이 메마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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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다. 이 회사가 대단한 것은 배가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가게 한다는 것이다. 배를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버겁다”. 어딜 가서도 무슨 일이나 척척 해결해내고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남자의 로망일진데 촌스럽게 순수 근무 시간으로 떼우고 있다. 멋 없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9월 경에 다른 자리를 알아보거나 자리가 없더라도 그만 두고 차분히 앉아서 생각을 좀 정리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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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한 마디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그럴 자격이 그닥 없음이다. 학창 시절 내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술상 앞에 앉아 티비를 보다가 김대중이 나오면 빨갱이라고 욕했다. 난 그런가보다 했고 여느 젊은이들처럼 정치보단 스포츠와 여자에 집중했다. 97 대선 때는 개구리복을 입은 채로 인생에 처음으로 주어진 투표권으로 이인제를 찍었다. 한 나라의 대표라면 가오가 9할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젊고 잘 생긴 사람이 젊은 사람에겐 끌리는 법이다. 김대중이 당선된 이후에도 정치엔 그닥 관심이 없었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퍼져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또래의 주된 관심사는 술과 여자와 음악이었다. 그러면서도 간혹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열을 올리는 건 영락없는 한국 남자이기 때문이고.
이명박의 가장 큰 업적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대선에 출마하고 당선되고 나라를 주무르는 일련의 사건은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게 만들만큼 위협적이다. 소중한 존재는 옆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 적어도 나같이 무관심한 이에겐 그렇다.
염치 없지만 햇살이 따뜻했던 국장례식장의 붐비는 인파들 사이에서 쭈뼛쭈뼛 서 있다가 담배 하나 피고 자리를 떠났다. 그저 고맙고 미안하고 그런 복잡한 심정이라 도저히 자리에 있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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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드러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 라이딩 때마다 이상 징후들이 느꺼진다. 프레임이 덜덜거리고 브레이크가 무겁다고 느껴질 때마다 톰의 킬러 카가 머리 속을 맴돌았다. 바이크가 산산히 분해해 도로 위의 핏덩어리가 되는 상상을 한다. 바로 저 세상에 간다면 꽤나 멋있는 죽음임엔 틀림이 없겠으나 강원래처럼 되는 건 그닥 가오가 안 산다. 빗방울이 어지러이 날리던 날 아침, 충동적으로 구청으로 달려 물에 빠진 쥐같이 해가지고서는 폐지 서류에 서명을 했다. 사이트에 매물을 올렸는데 연락이 없다. 낡은 바이크에 대한 로망에 목숨을 담보하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남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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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나 스펙터의 음악을 듣다가 충동적으로 차를 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음악에 관한 재능이라면 남김 없이 타고난 듯한 이 처자의 음악은 달리는 차 안에서 들어야만 할 것 같은거다. 황량한 골방에서 들어주기엔 미안하다. 리얼리티 바이츠의 위노나가 달리는 비엠따불류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는 장면이 제일 어울린다고 해야겠다. 문제는 오직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고액을 투자하기엔 내 경제 관념이 너무 서버렸다는 거다. 패드러스를 파는 결심은 섰는데 중고 할리로 갈지 무리해 차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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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엔 라타탓을 배경음악 삼아 바타유를 다시 읽었다. 여유로운 주말 저녁엔 라타탓이 제일 잘 어울린다. 훌륭한 음악을 소개해준 용 언니에게 감사한다. 음악에 대한 재능이라면 그 어느 하나도 타고 나지 못한 놈인데 음악을 자기 만의 컨텍스트로 소화해 내는 걸 보면 감탄하고 만다. 유일하게 음악적 취향을 공유하고 있는 자가 그라는 사실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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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일요일엔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평일에 머리 속을 무겁게 잠식하는 지겨운 수면 부족은 주말이면 말끔이 사라진다. 빌 프리셀을 틀어놓고 바타유의 문장을 되씹는다. “So much horror makes you predestined.” 무섭도록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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