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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미하일

by erggie 2009. 7. 6.
우즈벡 식당에서 거나하게 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 건 새벽 1시 쯤이었다.
미하일은 부인이 신신당부하며 부탁한 우즈벡식 탄두리 만두 박스를 그의 포드 뒷좌석에 모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 운전해도 괜찮겠어?
- 안전벨트나 매.
식당에서 내내 농담이나 따먹으며 흥청망청하던 노인은 어디에도 없고 눈은 이미 진지하게 변해있다. 가벼운 식사로 얘기를 나눌 때의 그 빨강코 할아버지와 오피스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진지모드는 전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대시 보드 앞에 앉아 있는 이 백발의 노인은 어느샌가 오피스의 카리스마 모드로 돌변해 있다.
- 이봐, 넌 여기서 뭐하는거야?
- 뭐, 뭐라구?
- 이런 시골에서 썩을 놈이 아니야 넌. 너만 유일하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거 알아? 더 큰 물로 가.
- 농담하지 마. 난 내 일에 만족해.
- ..
- ..
- ..
- 사실은 말야. 나도 기회를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말야. 큰 물이 안 보여.
- 아메리카!
- 무슨 소리야. 몰락하고 있다구. 이제 미국의 시대는 갔어.
- 이봐 젊은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말야. 미국은 절대 몰락할 수 없어.
- 그렇담 할아범은 유대인이 아니었으면 미국에 가 있었을까?
- 아니, 유대인이라도 미국에 가야만 했어. 내 실수였지. 실수를 뒤늦게 깨닫기 전에 미국으로 가.
- 글쎄, 영어도 안되는데다 유색인종이잖아.
- 무슨 소리야 너 정도면 통해. 미국에 인종 차별이 있단 얘기도 너한테 첨 들어 임마. 경찰이 고소당할까 무서워서 유색인종이라면 체포도 못하는 곳이 미국이야.
- 그래도 자본주의로 썩을대로 썩은 미국은 싫어. 더 나은 곳이 있을거야.
- 어디 있는데? 이봐 젊은이, 내 앞에서 사상이니 혁명이니 얘기할거면 당장 차에서 내리는 게 좋을걸세. 그건 잘난 이상이 건설한 지옥에서 살아본 사람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지. 철 좀 들어 이 친구야. 미국의 힘은 추악한 인간의 본성에 있어. 그게 인간이고 인간이 이룩한 사회의 현실이야.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이상을 추구한 유토피아가 소비에트 연방이야. 추악하되 탄탄한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사회가 힘을 얻는단 걸 역사가 말해주고 있어. 제발 철 좀 들어 이 친구야.
- ..
보드카의 취기가 뒷좌석에서 솔솔 피어나는 탄두리 만두 냄새와 라디오의 재즈 소리에 녹아 정신을 희미하게 했다. 그래 현실 감각... 술과 음악에 취해 피했던 현실 감각과 골방에서 노트에 긁적였던 이상에 웃음이 났다.
- 영감, 그래도 난 여전히 모르겠어.
- 그만 지껄이고 잠이나 자.
- 어 그래.
그래서 창 밖을 달리는 야자수를 세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정신줄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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