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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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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ggie 2009. 5. 23.
백양 나무가 무거운 하늘 아래에서 살랑거리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는데 형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촌, 노무현이 죽었데요.
누.. 누구요?
노무현이요. 노무현.
관심 없어요. 저 바빠요. 전화 끊어요.

친구의 고급 SUV의 대시보드에 발을 올리고 진록의 백양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하나 물었다.
형, 자살이래요. 산에서 뛰어내렸다네요.
그래.

가는 비가 흩날리는 잿빛 하늘 아래에서 진록의 백양 나무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났다.
저의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적당히 타협하고 니는 뒤로 빠져라.
부모가 자식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역사를 제가 바꾸겠습니다.
권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진실을 말하면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던 역사를 제가 바꾸겠습니다.

결국 어른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결론만 주고 가는 게 아닌가.
까불면 뒈진다는 비정한 진실에 가장 걸맞는 역사 하나 남겨두고 떠나는 거 아닌가.
밉다 미워.

불꺼진 방안에 홀로 누워 내내 담배만 피워댔다.
당장에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려 버려서는 따라 뛰어가 뒷짐지고 쓸쓸이 걷고 있을 그의 뒷덜미를 잡고 화라도 내고 싶었다.

권력에 빌붙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에 너무나도 잘 적응하고 있는 범인인 나에겐,
책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다던 그의 가는 길에 따뜻한 말 한 마디 해 줄 여유조차 이젠 남지 않았나 보다.

삼사라가, 변해가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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