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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흐란트

by erggie 2008. 7. 5.


요즘 회사 건물 옆에 줄지어 서 있던, 오래전에 가동이 중단된 엄청난 공장들을 헐고 공원을 짓고 있다.
8층 휴게실에서 레고같은 포크레인과 사람들이 일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축구장 3개 정도의 공간에 늘어서있던 공장을 며칠만에 깨끗히 없애버렸다.
아, 우리 나라가 건설 강국이긴 하구나 한다.

인도인 사가라도, 아르메니아인 흐란트도 공사 현장을 넋을 잃고 구경한다.
사가라는 자기 나라였다면 남아도는 인력을 동원하여 손과 해머로 깨고 앉아 있느라 몇년이 걸렸을거라 하고
흐란트는 서로 일을 미루느라 싸움이 났을거라 한다.
-흐란트는 공산주의 사회를 몸으로 느껴온 세대로 뼈까지 사무치는 환멸을 느끼고 있다.-

아참, 정들었던 흐란트가 우리 프로젝트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서 다른 층으로 갔다.
타고난 수다쟁이임에도 불구하고 난폭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한국인 친구가 없다.
다른 층으로 이사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층으로 놀러와 같이 공사 현장을 구경하며 수다를 떤다.
히딩크, 유가, 일, 사람, 결혼, 회사, 한국, 사랑.

유가 상승으로 인해 러시아가 때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흐란트는 러시아가 그 돈을 현명하게 쓰길 바라고 있다.
나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는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러시아인들은 술을 마신다고 대답한다.
한국 사람들도 마신다고 말해주었는데, 어디다가 비교하냐고 웃는다.

흐란트는 아르메니아에서는 -흐란트는 자부심이 강한 아르메니아인이다- 회식을 갈 때 어디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러시아인들은 마시러 가자고 한다고 한다.
궁금히 생각해보니 우리도 마시러 가자고 한다.
아직 술만 있으면 안주는 아무려면 좋은 바닥이 이곳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흐란트가 한국에서 이해가 안되는 현상의 원인을 묻는다.
한국인들은 무리지어 술을 마시는데 어째서 싸우지 않느냐는거다.
러시아인들은 술과 싸움이 일상인데 여기선 당췌 싸움을 볼 수 없어서 신기하단거다.
그러고 러시아 속담까지 몇 개 얘기해준다. -흐란트는 러시아 속담에 아주 밝다-

보드카와 싸움 없는 결혼식은 결혼식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술 마실 생각하지 마라.


뭐 이딴 식의 속담이 있다고 한다.
흐란트도 영어 못하고 나도 영어 못하니 해석 상의 문제는 있겠지만 대충 이해하기론 그렇다.

내가 우리도 맨날 말싸움한다고 하니까 그건 싸움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취하고 비틀거리고 오바이트를 해도 노래나 좀 흥얼거리다가 조용히 집에들 들어가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참 재미없고 변태적이다.

인간 사이의 분쟁 같은 것들은 사회를 이룬 사람들에겐 당연한 것이 아닐까.

발달된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대화로 해결하거나,
안되면 주먹이라도 휘둘러서 감정적 앙금을 씻거나
뭐, 그런 다이내믹한 게 좋지 않나.

다들 꿍하게 속내를 숨기고는 혼자서들 감당하려고 한다.
변태스럽다.

이 바닥에 흘러들어와서 참 고분고분하게 착한 남자로 살고 있는데,
점점 변태스러워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고 실제로 정신적 병리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사회 탓을 조금 하고 싶다.

껍데기를 벗어버린 진솔한 대화나 거침없는 주먹질, 또는 격한 성관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런 제길, 도대체 무슨 얘길 지껄이고 있는 건지 나도 당췌 모르겠다.

역시 또 혼자 이기적인 생각에 젖어 있다가 흐란트의 질문이 생각나서는 누가 알겠냐고 대답한다.
그러게, 누가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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