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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ara

트위터 사회개벽 담론

by erggie 2010. 10. 20.

제목부터 쓰고나니 거참 거창스럽네.
요즘 웹상에 올리는 글이라고는 트위터에서 잡담 정도가 다인 상황에서 간만에 포스팅하려니 낯이 설어서 말이지.

간만에 더딘 손가락 힘 좀 주는 이유는 역시 트위터이다.
한 달정도 전인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허지웅고재열이 트위터에서 난상 토론을 벌였다. 주제는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

실제 두 논객이 주고받은 설전
http://bettween.com/dogsul/ozzyzzz
허지웅의 정리
http://ozzyz.egloos.com/4457808

허지웅의 트윗을 팔로우하고 있는지라 둘의 흥미진진한 설전을 즐감했었다. 허지웅의 블로그 피드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가능한한 객관적인 입장을 환기하며 관전했었다. 논쟁 사이사이에 낯익은 김규항김작가까지 가세해 한참 논쟁에 불이 붙었었는데 종국에는 고재열의 기자 자격을 의심케하는 함량미달적 대응으로 싱겁게 끝나버린 듯 하다.

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견의 쟁점은 각자가 바라보는 사회 변혁이란 그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화된 세상을 기대하는 그릇의 크기와 그릇에 담길 것에 대한 기대가 달랐던 것이다. 트위터는 그 엄청난 파급력으로 분명 사회의 그림을 크게 바꾸고 있다. 고재열은 그런 변화에 의미를 두고 있고, 허지웅은 트위터는 그저 단순한 도구일 뿐이며 의미있는 변화란 결국에는 도구를 손에 쥔 인간의 몫이라는 입장인게다. 김규항은 직접 포스팅(1, 2)을 통해 허지웅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나 역시 객관적 입장 고수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허지웅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와 이 담론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얼마 전 우연히 읽게 된 말콤 글래드웰의 뉴요커 사설 때문이다. 글래드웰은 이미 블링크나 아웃 라이어와 같은 베스트셀러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베스트 셀러라고 하면 반감부터 가지는 반골적 성향 때문에 그의 책을 직접 접해본 적은 없지만 지인들의 일독 권유가 수차례 있었던터라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시대의 화두인 트위터 및 페이스에 관한 사설을 썼다. 알고보니 그는 오랫동안 뉴요커에 사설을 기고하고 있었다.

첫눈에도 부담스런 5페이지짜리 장문의 사설(돈 벌기 참 어렵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우선 이란 혁명에서 트위터의 역할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으로 가볍게 시작한다. 그리고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사를 생생한 서사로 되짚어가며 역사적 사회 혁명의 밑거름을 끌어낸다. 그가 바라보는 사회 운동 성공의 관건이란 운동 당사자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 그리고 마틴 박사와 같은 카리스마적 존재를 중심으로 짜임새있게 구성된 조직이다.

평범한 사람이 김연아와 맞팔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것이 트위터이다. 그러나 트위터가 형성한 평등한 유대관계가 이끌 수 있는 사회 변화의 한계는 자명하다. 1960년 목숨을 걸고 백인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런치 카운터에 앉아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던 학생들의 소문은 조직적으로 구성된 네트웍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졌으며 미국 전역에서 시위대를 끌어모았다. 흉흉한 테러에 목숨을 잃는 사태도 끈끈한 유대를 통해 밀려드는 시위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임금이 체납된 고용자가 트위터를 통해 도와달라고 소리쳤다면 얼마를 모을 수 있을까. 사회 운동이란 그저 흥미로운 플래시 몹이 아니지 않은가.

글래드웰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소셜 네트웍 지지진영의 바이블격인 [Here comes everybody]의 저자 셔키 교수이다. 셔키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잃어버린 블랙베리를 찾은 영화와 같은 사례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며 소셜 네트웍의 힘을 설파한다. 글래드웰의 답이 통렬하다. “Viva la revolution!”

그나저나 트위터 좀 줄여야겠다. 지나가다 어떤 여자들 세계에서는 한국의 트위터가 찌질한 중년독신남성의 시간 떼우기 놀이터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길 들어서이다. 소문의 진위 또는 인식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그런 분위기 자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의해야 한다. 여자들의 세계는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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